나의 이야기

[스크랩] 책 속의 소시집 - 김영숙 시인 <마리오네트, 오로라를 꿈꾸다>

꽃귀신 2017. 2. 28. 23:15


책 속의 소시집

마리오네트, 오로라를 꿈꾸다



김영숙 시인


 경남 하동 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재학 중. 월간『문학세계』등단(2015년). 제25회 산업축제문학공모 우수상, 제1회 등대문학상, 울산 남구 백일장 입상 다수 수상. 문학세계문인회 정회원, 노둣돌시문학회·글쌈문학회 회원. yeong30640@naver.com





물 외 4편



무작정 꿈꾸는 대로 산다
조각이 나면 나는 대로
그러다 손 닿으면 모르는 척 합류하고
싱겁다는 둥 물에 물 탔다는 둥 물러 터졌다는 둥
소문 같은 험담으로 둥둥 떠다닌다
나, 하도 돌고 돌아서
맨몸으로 수천 번을 돌고 돌아서야
흔들리는 수심이 비로소 정돈된다






천사가 있어요



화단에 키 작은 나무, 나의 꽃 손녀입니다
그런데 어린 손녀의 눈엔
나무도 다 같은 꽃입니다
푸른 잎들이 꽃으로 피어날 것을 아는지
무조건 꽃, 꽃이라 부릅니다
차츰차츰 나비가 날아들고 벌이 노래합니다
내 집과 딸네 집 10분도 채 되지 않는 거리
동화 한 페이지가 휘리릭 펼쳐지고
아파트‘소방차전용차선’ㅇ 동그라미 글귀에
두 손을 얹고 부릉부릉 운전을 합니다
나는 하루에도 수십 번 손녀의 차를 타고
멀미 없는 골목을 헤매다 돌아오곤 합니다

꼭꼭 잠겨진 바람
나는 내가 바람이란 걸 잊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윙윙 소리조차 낼 수 없었던 깜깜한 방
연신 장미꽃만 만들던 딸애의 엄지손에선
늘 피가 뚝뚝 떨어졌지요
가위질로 찢겨진 종이 부스러기
이리저리 널브러져 흩날리고 싶었지요
여기에 천사가 있어요
아팠던 딸애의 딸이
지금 할머니가 된 나를
아프게 매만지고 있어요
그러나 사방은 꽃이네요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
손톱 긴 바람이 붑니다
과일집 아저씨도 안녕
완구점 아줌마도 안녕
재수 좋게 반값으로 깎은 흙놀이 장난감을
계산할 새도 없이 낚아채고 도망하는 손녀를 보면서
소리 하날 들었습니다
꼭꼭 잠가두었던 바람이
사샤샤 열리고 있었지요






마리오네트, 오로라를 꿈꾸다



처음엔 몰랐어요
비밀스런 숲에서 맨몸으로 나왔음을

천둥 번개 올라치면 몸도 맘도 발가벗고
미친 듯 달동네를 쓸고 다녔어요
제 애미 반기듯 신기루를 보았지요

줄, 그 질긴 줄에 그리움 오래도록 감겨
숨가쁘게 터치한 스타카토는 몹시 집요했지요

수액에서 뿌리를 퍼올려
바스라지게 슬피 울다가
뚝, 고개 떨구는 동백이 웃는데요
줄 끊어진 인형이 허공을 떠도는데요

유리를 통해 뒤섞여 나누어져 있는 것들
그래도
야금야금 흰 광채를 물들이네요
거울 속 걸음으로

수액에서 뿌리를 퍼올려
바스라지게 슬피 울다가
뚝, 고개 떨구는 동백이 웃는데요
줄 끊어진 인형이 허공을 떠도는데요







별밭 지나서




검정 비닐 봉지 하나
나뭇가지에 걸린다
바람 먹은 내가 푸석하게 앉았다
저만큼 밀려난 빛들
희끗희끗 남아 있는 하늘을 연다
남창 가는 길

딸네 집 가는 길은 온통 별밭이다
제대로 못 입히고 못 먹인 딸
그래도 딸애는 엄마가 되었다
늘 비어 있던 딸애의 눈엔
별이 가득 박혀 있다
발자국 떼어 놓을 때마다 아픈 별들이
미안한 내 발바닥을 마구 찔러댄다

새의 날개를 훔쳐
바람을 달고 싶었던 시간들
마른 뼈들이 떨어져 나가고
봉지가 부풀려놓은 바람이 달아난다
넘실넘실 지나는 버스가
별밭을 넘는다








국수 먹는 날



아주버니는 집들이로 ‘양남국수’를 사 오셨다 새로 이사한 집에 단명한 집안 내력 내치려 열 다발 명줄을 들고 온 것이다 막내인 내 남편을 품에 안고 가셨다는 시아버지, 나는 지금 삶아 건진 면발에서 잃어버린 그의 날들을 세고 있다 국숫물이 넘치도록 팔팔 끓었을 한때가 아쉬운 사리로 뭉쳐 있다 국수 먹는 날은 시아버지가 살아 오시는 날 억울한 시간들이 길게 길게 늘어나는 날 부전자전 될까 두려운 내 남편의 시간들이 쫄깃쫄깃 야물어지는 날




출처 : 월간 문학세계
글쓴이 : (주)천우미디어그룹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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